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반도체 부족으로 생산을 중단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반도체 기업 넥스페리아를 둘러싼 중국과 네덜란드의 갈등이 미국, 유럽, 한국까지 자동차 산업 전체를 흔들고 있는 상황입니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이후 가장 심각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위기가 발생했습니다.
사건의 핵심은 지난 9월 30일 네덜란드 정부가 넥스페리아에 대한 긴급 경영권 장악 조치를 내린 데서 비롯됩니다. 이에 맞서 중국 정부는 10월 4일 자국 내 넥스페리아 공장의 수출을 전면 금지했습니다. 넥스페리아 전체 반도체 생산량의 80퍼센트가 중국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이는 사실상의 공급 차단과 같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호주 자동차 부품 제조협회 회장 존 보젤라는 지난 10월 16일 성명에서 반도체 출하가 빠르게 재개되지 않으면 미국과 다른 많은 나라의 자동차 생산이 차질을 빚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블룸버그 통신은 미국 내 자동차 공장이 칩 부족으로 인해 2주에서 4주 안에 생산을 중단할 수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10월 28일 혼다는 멕시코 공장 가동을 중단했고, 독일 폭스바겐도 10월 29일부터 골프 모델 생산을 중단했습니다.
넥스페리아가 생산하는 반도체는 자동차의 창문 개폐부터 전자제어장치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됩니다. 이 회사는 글로벌 범용 반도체 시장에서 1위이고 세계 자동차용 범용 반도체의 40퍼센트를 공급합니다. 며칠만 공급이 중단되어도 조립 라인 전체가 멈진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증언입니다.
한국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현대차와 기아도 넥스페리아 반도체를 공급받고 있습니다. 다행히 현재 수개월치 재고를 확보하고 있어 당장의 생산 차질은 없는 상황이지만, 사태가 3개월 이상 장기화할 경우 영향을 피할 수 없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것이 단순한 기업 분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미국과 유럽의 지정학적 압박이 배경에 있습니다. 중국 기업 윙테크는 이미 미국 상무부 수출규제 명단에 올라 있었고, 미국이 규제 대상을 명단 기업의 자회사까지 확대하면서 네덜란드 정부가 긴급 조치를 취하게 된 것입니다. 중국이 반도체 수출 차단으로 맞대응한 것은 공급망의 정치화라는 더 큰 위기를 알리는 신호입니다.
현재 상황은 2025년 12월 1일 기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윙테크는 네덜란드 대법원에 항소장을 제출했고, 중국 상무부장 왕원타오는 11월 26일 유럽 담당자와 통화에서 네덜란드의 압류 조치 철회를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양측의 주장은 팽팽하고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한국 기업들이 주의해야 할 점은 명확합니다. 자동차 산업뿐 아니라 반도체를 사용하는 모든 산업의 공급망 재편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반도체 기업들은 미국의 규제 강화와 중국의 역공 사이에 끼어 있는 상황입니다. 개별 기업의 차원을 넘어 국가 차원의 공급망 다원화 전략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2020년 팬데믹 이후 한국 산업계는 공급망 리스크의 심각성을 배웠습니다. 이번 넥스페리아 사태는 그 교훈이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 기업의 경영권 분쟁이 글로벌 자동차 산업 전체를 흔드는 모습에서 우리는 현재의 국제 경제 질서가 얼마나 불안정한지 직감하게 됩니다. 비즈니스 리더들은 이제 단순한 비용 최적화를 넘어 공급망 회복력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